[Astronomy] 천문학자 이야기 두번째 - 히파르코스

신하영 승인 2018.01.30 16:19 | 최종 수정 2018.01.30 16:20 의견 0

난이도:*

히파르코스(Hipparchos B.C 190~125)

히파르코스는 기원전 190년 에게 해에 자리잡은 로도스 섬의 평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당시는 지중해의 판도가 바뀌고 있던 때였다. 알렉산더 대왕이 지중해를 정복한 이후 그리스 과학의 중심지는 아테네에서 알렉산드리아로 옮겨가고 있었던 것이다.

평민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글자를 읽을 줄 아는 히파르코스는 한 상인으로부터 귀중한 책 서너 권을 얻게 되었는데, 그 책의 지은이는 사모스 섬의 아리스타르쿠스였다. 아리스타르쿠스는 반달일 때 태양과 달, 지구가 직각 삼각형을 이룬다는 전제 아래 태양과 달의 상대적 거리를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산출한 과학자였고, 태양 중심설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히파르쿠스는 아리스타르쿠스의 책을 여러 차례 정독하였고, 아리스타르쿠스의 주장(태양중심설)을 밑받침할 만한 증거를 찾는 일에 열중하였다.

학문의 메카 알렉산드리아로 진출한 히파르코스는 새롭게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에서 틀어박혀 나올 줄을 몰랐다. 기원전 134년 하늘에서는 돌발사태가 일어났다. 예고도 없이 1등급의 별이 새로 출현한 것이다. 이 때부터 사람들은 별들의 위치를 정확하게 나타낸 최신 관측기록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히파르쿠스도 이 일에 뛰어들었다. 그는 3년에 걸쳐 약 1080개의 별의 위치를 그린 첨단 성도를 만들었으며, 별을 밝기에 따라 6개로 등급을 나누었다. 히파르쿠스는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아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고대인들의 관측 기록을 샅샅이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는 도서관에서 바빌로니아와 고대 이집트인들이 남긴 천체관측 기록을 연구하였고, 이미 기원전 700년 무렵에 조직적으로 관측한 바빌로니아의 행성 운행표도 발견하였다.

그는 고대 관측 분야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일인자였다. 그는 바빌로니아의 천문 기록과 그리스 관측 기록을 비교하면서, 춘분점과 추분점이 그 위치를 서서히 바꾼다는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황도 12궁 중 처녀자리의 스피카를 눈여겨 보았다. 그가 관측한 바에 따르면 스피카는 추분점에서 6도 떨어져 있었는데, 170년 전에 측정한 위치는 8도 라는 것을 알아내었다. 이는 세차운동의 결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는 돌고 있던 팽이가 멈추기 전에 팽이 축을 따라 작은 원을 그리듯이 지구 자전축의 북극점도 그러한 모습으로 회전한다는 세차 운동의 이론을 정립하고 그 값을 계산해냈다. 그 값은 2만 6000년이었다. 이는 대단한 발견이었다. 히파르코스는 천체의 고유 운동법칙을 마음에 그리고 있었다. 그는 아리스타르쿠스의 태양중심설이 타당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나이 쉰 살이 된 히파르코스는 로도스 섬 해변가에서 가까운 산꼭대기에 천문대를 세웠다. 또한 그는 두 개의 다른 위도상에서 달의 높이를 관측해 달이 지구 지름의 36배 가량 떨어져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지구-달 거리: 384000km /지구 지름: 12756km =약 30) 그는 아리스타르쿠스가 구한 값(지구의 9배)을 수정한 것이다. 로도스에서 히파르쿠스는 포시도니우스에게 지구의 크기를 정확하게 잴 수 있는 방법과 천문학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구면삼각법을 가르쳤다. 포시도니우스는 말년에 로도스를 떠난 적이 없는 히파르코스의 옆에서 그와 함께 은둔생활을 하였다. 그리하여 포시도시우스에게는 히파르코스의 계승자라는 영광이 주어졌다.

히파르코스는 천문학에 있어서 수많은 우주의 신비를 캐내었다 그러나, 단서가 될 만한 중요한 저서가 한 권도 남아있지 않아 그의 연구 업적은 300년 뒤의 과학자 프톨레마이오스의 기록을 유추해서 간접 평가할 수 있을 뿐이다.

* 참고문헌 : 천재과학자들의 바보이야기 이면우 지음. 서울; 아침 1990

우주의 신비를 캔 영웅들 : 인물로 보는 천문학사 이향순 지음. 서울 ; 현암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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